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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전설에서 비롯된 도플갱어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외모와 일치하는 또 다른 자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외모와 완전 붕어빵인¸ 하지만 인성은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누군가가 뜬금없이 갑작스럽게 떡하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떠시겠는가요? 물론¸ 그런 요상스런 상황을 접해보지도 접할 일도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기에 별 시답지 않은 일로 치부할 것입니다. 허나¸ 섬뜩함이 엄습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도플갱어』는 이러한 예기치 못한 기이한 현상을 맞닥뜨리면서 제 몸을 관장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아의 정체성을 죽이고 되살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입니다. 


단¸ 『도플갱어』를 보실 분들을 위해 공지 사항 하나를 전달해 드리자면 당 영화¸ 호러 분위기로 주구장창 러닝타임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그런 종류의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스릴러의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예의 그 장르만의 긴장감은 간헐적으로 툭툭 치고 들어오는 코미디로 이완이 되고 중반을 넘어서는 한 마디로 골 때리는 또는 B급 스타일의 로드무비로 진입합니다. 한 마디로 갖가지 장르를 비빔밥 마냥 뒤섞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대신¸ 전주비빔빕의 그것처럼 한번 먹으면 잊을 수 없게끔.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기괴한 방식을 통해 영화의 감독인 구로사와 기요시는 시스템으로써는 더할 나위 없이 합리적인 자본주의의 세계를¸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부조리한 이 세상을 유쾌하게 조롱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 역시 부조리함으로 가득함을¸ 하는 일마다 배배 꼬이는 『원더 보이즈』의 그래디『마이클 더글라스』 교수처럼¸ 과학자 하야사키『야큐쇼 코지』를 통해 농담 반 진담 반 식으로 던집니다. 특히¸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의 그러한 의중을 자아를 분열하며 복제해내는 하야사키를 이중 삼중의 분할화면으로¸ 둔중한 둔기로 뒷통수를 가격당하듯 화들짝스런 장면으로 드러냅니다. 때문에 도플갱어란 낯익은 문학적 영화적 소재를 다룬 이 영화는 그리 친숙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대신¸ 범상치 않은 누군가를 만나면 쉬이 가까이 할 수는 없지만 불현듯 자꾸만 떠올려지듯 은근슬쩍 보는 이의 심사에 꼬드김을 던집니다. 



미이케 다카시와 함께 V시네마 출신으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구로사와 기요시는 비주류?를 통과한 자신의 토대를 때로는 무너뜨리며 때로는 구축하며 구로사와만의 영화적 지평을 공포라는 장르를 변주하며 지금 여기에 다다랐습니다. 당 영화를 통해서도 그는¸ 물론 전작에 비해 엄격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불안과 혼란스러움을 독특한 언어로 풀어냅니다. 마치¸ 지리멸렬한 삶의 짓누름을 더 이상 유한한 자신의 몸 안에 쌓아 가둬 두지 말고 내 안의 또 다른 나 혹은 진정한 나를 불러내 한번쯤 확 돌아버려 맘껏 쏟아내라고 살짝이 말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행동방식이야말로 팍팍한 이 놈의 세상에 구멍을 뚫고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16/02/19 08:37 2016/02/1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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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의자에서 일어서는 순간 사르르 녹아 날아가 버리는 가볍고 달착지근한 영화를 보고싶은가요? 그렇다면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은 피해야 할 선택 1순위가 될 것입니다. 우선 영화에 홀딱 반해버린 요컨대 지지자들은 극장 불이 켜지거나 말거나 의자에 그대로 눌러앉은 채 방금 본 영화에 대한 황홀한 백일몽 속으로 젖어들 것입니다. 반면 자신의 선택을 속절없이 후회하며 영화에 대해 성토하기 바쁜 반대파 역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뭐 지지자건 반대파건 얼얼한 뒷통수는 기본 사양이고. 『도그빌』에는 어쨌든 그만한 위력이 있습니다.


대자본이 없이도 스펙터클을 창조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라스 폰 트리에는 대단한 테크니션이자 도그마 선언의 주창자로 유명합니다. 도그마 선언의 기본 취지는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핸드헬드『들고찍기』를 이용한 흔들리는 피사체와 흐릿한 영상은 폰 트리에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합니다. 한편 2000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둠 속의 댄서』는 이 감독에 대한 반응들을 한층 더 양극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작품 입니다. 폰 트리에의 비판자들은 영화의 신파성과 함께 장식을 최소화한다는 스스로 세운 원칙을 위반한 감독을 말만 앞세우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보다 강한 모성애로 무장한 셀마『비욕』가 벌이는 사투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각설하고¸ 충격적인 내용에 더불어 톱스타 니콜 키드먼이 출연했다는 점 때문에 올해 칸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던 『도그빌』에서 역시 형식상의 실험이 빠질 리 없습니다. 일단 일체의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접한 사람들은 첫 장면부터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록키 산맥 아래 작은 마을 도그빌이 배경이라고는 하는데¸ 이건 숲도 산도 당최 보이지를 않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건 하얀 초크로 경계선을 친 후 휘갈긴 산이니 밭이니 하는 글자들 뿐. 얼핏보면 갈데 없는 주차장처럼 보이는 이 공터를 사과꽃 내음이 풍기는 시골 마을로 만드는 것은 그렇다면 관객과의 규약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그빌』이 좇는 형식은 연극.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장과 막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마을 상황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는 나레이터『존 허트』가 사건의 추이며 등장인물의 심리를 점잖게 읊어주기도 합니다. 어쨌든 영화관에 자리를 잡고 앉은 관객들은 지금부터 이 하얀 금이 무성한 숲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이상이 영화가 가져다주는 첫 번째 난관.


처음으로 찾아온 어려움이 형식에서 유래한다면¸ 내용상의 난관 역시 그에 못지 읺습니다. 이윽고 영화는 갱들의 추격을 피해 마을 주민이라고 해봐야 달랑 열 다섯 명인 깡촌 도그빌로 숨어든 그레이스『니콜 키드먼』의 고난사를 하나하나 펼쳐 보이기 시작합니다. 순박해 보이던 마을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서 점차 돌변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그녀는 마을 전체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남자들은 이 꽃 같은 아가씨의 육체를 유린하고¸ 심지어 목에 묵직한 개목걸이를 채우는 만행마저 서슴지 않습니다. 한편 유일한 희망이었던 톰『폴 베타니』마저 적들에게 그녀를 밀고함으로써 철저히 연인을 저버립니다. 이 개 같은 마을 도그빌에서 벌어지는 모든 야비한 행위들을 도리 없이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 그건 관객에게도 시험에 가깝다.


사실 인간 마음속에 내재한 어두운 본성이라는 주제는 더 이상 그리 새로운 내용이 되지 못합니다. 거기 더해 『도그빌』이 앞으로 나올 『만델레이』¸ 『워싱턴』과 함께 미국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소위 미국 3부작의 첫 번째 편이라고는 하지만¸ 엔딩 장면을 제외한다면 유독 미국을 꼬집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힘들다. 그리고 사실 영화는 미국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권력을 쥔 자는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 쪽에 무게중심을 둔다. 현실에서 칼자루를 쥔 쪽이 의심할 바 없이 미국이고 보면¸ 바로 그런 견지에서 『도그빌』은 미국을 비판하는 영화로 분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도그빌』의 진짜 놀라운 점은 주제나 형식상의 실험 자체보다는 감정을 쥐고 흔드는 라스 폰 트리에의 재간에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가 시작한지 오래지 않아 관객은 금세 자신이 현실『엄밀히 말해 현실에 가깝게 재현한』의 공간이 아닌 텅 빈 공터의 하얀 금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레이스의 끔찍한 수난사에서부터 영화 말미에서 벌어지는 관계 역전의 순간까지 영화는 내내 습격처럼 관객을 덮쳐옵니다. 전작들에서도 증명한 바 있듯¸ 감정을 휘어잡는 데 있어 폰 트리에는 독재자에 가깝다. 『도그빌』을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 걸작의 범주에 넣어야 하느냐¸ 아니면 혹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철저히 계획된 속임수일 뿐이냐에 대한 해답¸ 혹은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진부한 표현 그대로 관객일 뿐입니다. 어쨌든 확언할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 첫째로 『도그빌』은 의심할 바 없이 흥미로운 문제작이며¸ 둘째¸ 무엇보다 178분의 러닝타임 동안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은 영화 입니다.

2016/02/18 08:56 2016/02/18 08:56
동의자

정말 통쾌한영화입니다
결말을 말씀드리면.
인간의 그릇된 속성을 보여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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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를 놓고 갖가지 썰들이 종횡무진으로 교차된다는 현상은 그만큼 그 작품이 관객의 가슴살에 남겨놓은 해석의 폭이 크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재미가 있었다는 지배적 의견 하에 파생된 그것이라면¸ 이건 실로 성공적인 영화의 한 요건을 충분히 만족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시대의 문화적 패러다임을 선도하며 가공할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매트릭스』의 재림이 이 같은 현상을 벌써부터 자욱하게 흩뿌리고 있는 중입니다.


한데¸ 매트릭스 시리즈를 독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하고 있는 의지가 현상을 앞선다는 경구처럼¸ 우리는 이미 매트릭스의 거부할 수 없는 신화에 포박 당했다는 자백을 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일례로¸ 전편에서 한 얼라가 숟가락을 엿가락 휘듯 구부리며 일단 그렇게 된다고 믿으면 돼¸ 라고 했던 경우나¸ 속편에서 개떼와 같은 스미스 요원들에 의해 압사당할 위기에 처해있던 네오가 킁킁거리다가 트리니트의 겟 아웃『get out』이란 말 한마디에 박차고 나온 장면『『품행제로』에 대한 오마쥬?가 아니냐는 풍문도 있다』과 같이¸ 우리도 현상에 앞서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 열광할 자세가 일견 자생적으로 생성된 측면이 있지 않느냐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 너무 영화에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분명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영화에 대한 전대미문의 기대감은 원편의 신인류적 감성의 이미지와 철학적 사유의 무한한 세례로부터 기인된 것이고¸ 속편의 극대화된 볼거리들의 무자비한 살포 역시 관객들을 충분히 홀릴 만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악한 워쇼스키 형제의 철저한 계획아래 『매트릭스2 리로디드』가 1편과 3편에 뀡겨 있고¸ 별도로 진행 중인 『애니매트릭스』도 있기에 좀처럼 확실한 가닥이 잡힐 듯 말 듯 한 이야기에 대한 수많은 의견들의 치고받음은 필요불가결한 수순이라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필자는 『매트릭스2 리로디드』 보는 동안 정신없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조합해낸 언어가 이다지도 필설로서 표현해낼 수 없는 것들이 무수한지 영화의 아크로바틱한 장면들을 보면서 절실하게 느끼기도 했거니와¸ 인간의 이성으로 길어 올린 운명론이니 결정과 선택이니 인과이론이니 하는 잠언적 말씀들에 이리 저리 치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네오와 트리니트 모피어스가 인간의 최후의 도시 시온에 방문¸ 그곳에 암약하고 있는 실재의 인간들을 기계의 지배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매트릭스 심장부에 접근하며 사투를 벌인다는 영화의 이미지는 전편의 묵시록적 세계관을 성심성의껏 계승하고 있습니다. 다만¸ 무한대의 극치로 경이로움을 끌어올리려다 보니 디스토피아적 어두움이 조금은 희석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대신¸ 이러한 면을 리로디드는 매트릭스의 설계자를 비롯해 몇 명의 인물들의 입을 빌어 나지막이 설파하며 벌충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각효과와 서사에 간극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재미를 위시로 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스펙터클의 황홀함에 워쇼스키 형제는 너무 치중했고 동시에 철학강의 시간도 늘렸습니다. 원편의 충격적인 아우라에서 크게 나아감이 없다는 주장도 맞긴 하지만 인간은 들려주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에 더 마음이 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관객은 기겁할 만한 쿵푸+특수효과에 환호를 보내며 적잖은 에너지를 소진시켰고¸ 그럼으로써¸ 당연히 비대해진 텍스트의 메시지에 관한 측면에는 그만큼의 신경을 쓰지 못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거기에 더해¸ 한창 어리버리한 인물이었던 네오가 인식론적 헷갈림에 대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득도해가며 나아가는 모습을 서사와 액션의 맞물림 속에서 단계적으로 길어 올렸던 원편에 비해 『매트릭스2 리로디드』는¸ 따로 놀아서는 안 될 두 요소가 끝내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한편¸ 주름이 적잖이 잡힌 스토리의 전개 과정과는 사뭇 다르게 이제는 주저 없이 웬만한 일은 알아서 팍팍 해나가는 네오의 용가리통뼈적 행보는 위의 가설과 여러모로 닮았습니다. 이것이 샌드위치 안에 놓여 흰자와 노란자가 버벅이 된 후라이 같은 리로디드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은¸ 전언했듯 엄청난 돈으로 때려 박은 물량과 CG를 원화평이 안무한 몸 움직임에 잘 입혀 워쇼스키 형제가 주조해냈기 때문입니다. 짱깨권 배우들에 비하면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느려터진 동작의 서양인을 배려해 무한대의 속도와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공간 그리고 의상과 무기와 같은 소품들을 적절하게 특수효과에 배합한 결과가 보는 이들의 턱을 떨어뜨리기에 분명 모자람이 없었다는 얘기 입니다.


따라서 중력과 물리의 법칙을 무시하며 저.고속 촬영과 와이어에 의지한 채 당당당 날아다니는 그네들의 모습이 공허하다며 리로디드 전체를 폄하한다면¸ 자신의 해석이 최종독본이기에 뭐 어쩔 수 없지만¸ 너무 가혹한 평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화를 만족스럽게 본 많은 이들은 필시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가공할 만한 이미지에 우선적으로 매료됐기에 그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나서 신화적 상징과 기독교적 알레고리 위에 설계한 철학적인 사유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다고 본다. 물론¸ 이 역도 성립하고¸ 또 둘 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비중의 위치로 가늠하고 본 관객들도 많을 것입니다. 필자의 경우는 전자에 해당됩니다. 그러기에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분들¸ 필자와 같은 심정이라 본다.


결론적으로¸ 『매트릭스2 리로디드』¸ 『매트릭스』를 통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기대감 딱 20% 정도만 덜어내고 보면 무지하게 흡족해하리라 믿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절대 마셔되던 음료 깡통과 씹어대던 오징어 부스러기 훌훌 떨어버리고 얼른 나가시지 말길 바랍니다. 친분이 있는 기자한테 뒤늦게 들은 이야긴데¸ 『매트릭스3 레볼루션』의 예고편이 엔딩 크레딧 후에 나온단다. 극장에 따라 본 영화가 끝난 후 바로 또는 5분¸ 길게는 10분 뒤에 나온다고 하더라. 물론¸ 아예 예고편을 내보내지 않는 극장도 있다고 하니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네오와 스미스 요원의 행동을 유심히 잘 살펴보길 바랍니다. 전편과 다른 모습을 포착할 수 있을 거다. 이러한 단서는¸ 아마도 2편을 이해하고 3편에 접근하는 데 있어 아주 유용한 실마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2016/02/17 09:15 2016/02/1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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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읽는 이에 따라 스포일러가 존재한다고 생각될 수 있는 글이니 아니다 싶으면 바로 빠구하시길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데이비드 게일』은 스릴러 영화 입니다. 사형제도를 논하기 위해 스릴러라는 틀을 빌려왔다고 할지언정 또는 형식이 내용을 때로는 지배한다고 주장할지라도 엎어치나 메어치나 보는 이들에겐 결국 영화는 스릴러입니다. 사형제 존폐의 문제는 그러고 나서의 문제 입니다.


데이비드 게일『케빈 스페이시』은 잘 팔리는 저서는 물론이고¸ 강단에서도 그 어렵다는 욕망이론의 철학가 자크 라캉의 어록을 인용하며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게끔 유도하는 유능한 철학교수다. 동시에 그는¸ 사형제도 폐지운동단체 데스 워치에 가담하고 있는 열혈 운동가이기도 합니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게일은 데스 워치의 둘도 없는 절친한 동료 콘스탄스『로라 리니』을 강간 살해한 혐의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언도 받고 운명의 칼날 위에 서게 됩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날이 채 5일도 남지 않은 긴박한 상황에서 게일은 자신이 지명한 저널리스트 빗시『케이트 윈슬렛』와 인터뷰를 하며 자신의 무죄를 절박한 표정이 아닌 담담함의 자세로 호소가 아닌 권유로서 표현합니다. 빗시는 서서히 게일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포박당하며 그의 무죄를 확신하기에 이르겠습니다. 죽은 그녀의 몸 안에서 그의 정액이 검출됐음에도¸ 『양들의 침묵』에서 조디 포스터가 렉터 박사에게 관장당하 듯¸ 말입니다.


알란 파커 감독은 늘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언제나 무관심한 사형제도를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반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웅변합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영화로 다루었던 그의 전작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버디』¸ 『더 월』을 생각해보자면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닙니다. 스릴러라는 측면 역시 미키 루크와 로버트 드니로가 호연했던 『엔젤 하트』가 그의 필모그라피로 안착돼 있기에 특별하게 생소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대중적인 재미를 따져본다면 『데이비드 게일』은 충분히 즐길 만합니다. 위에 열거한 작품들보다 정치적인 색의 명암이 모호하기도 하거니와 『엔젤 하트』처럼 잔혹하면서도 난해한 퍼즐을 도용하는 대신 좀더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달리 말하면 고통스럽게 이야기를 껴 맞추지 않아도 될 만큼의 스릴러 장치만 주 뼈대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화는 알란 파커¸ 케빈 스페이시¸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세 명의 인물 면면만으로 입장료의 반대급부 역할은 충분히 합니다. 다만¸ 상당한 기대를 모았던 윈스렛의 캐릭터에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적잖이 있었다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그 공백을 콘스탄스 역의 로라 리니가 기대 이상의 호연을 펼침으로써 땜빵을 해줍니다.



그러나 기이하리만치 『데이비드 게일』에서 의문이 가는 점은 사형폐지론자들을 재현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의지를 관철시켜야 하는지 말입니다. 정말이지 영화를 본 실제 사형제 반대 운동가들로부터 『데이비드 게일』이 좋은 말을 이끌어낼지는 몹시 회의적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이 제도로부터 가장 큰 피해자인 흑인들이나 빈곤한 자들을 주인공 또는 조연으로 등장시키지 않고¸ 경제적 가치로 환원시킬 수 있는 변수들을 많이 소유한 중산층 이상의 교수인 백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점도 그러합니다.


결국¸ 영화의 이러한 설정들은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고스란히 스릴러라는 장르 안으로 포섭되며 복무됩니다. 특히¸ 반전이 준비돼 있는 종국으로 치달을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거세집니다. 그러기에 보는 이들로서는 감독이 건네는 내밀하고 둔중한 사형 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그물망처럼 존재하는 제도는 인간이라는 생물체가 이성적으로 완벽하고 더 완벽해지려는 강인함에서 생겨난 규율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얼마나 추레하고 미약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잘 알기에 그걸 감추고 보충하고자 서로들 약속하고 근근이 운용해가는 체계일 뿐입니다. 하지만 편하고자 만든 그러한 제도가 현대 사회에서는 역으로 대중들을 옥죄는 하나의 억압도구로서 쓰이고 있습니다. 사형제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따라서 오갈 데 없는 대중은 위 같은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대피해 자신만의 재미와 위안을 찾아 철저히 즐기며 개인화돼가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영화를 보는 행위입니다. 대중은 그래서 골치 아픈 이야기나 거대한 소재를 끌어들인 작품보다는 가볍게 즐길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해 관람합니다.


이 같은 일반인들의 습성을 잘 인지하고 있는 제작자나 감독은 상황이 이렇다보니¸ 무언가 생각할 거리가 있는 영화를 만들 때 의도적으로 상업적인 측면의 재미도 같이 운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하는 행동과 다를 바 없기에 보편적으로 좋은 결과로서 마무리되지는 못합니다.


『데이비드 게일』도 바로 이러한 범주 안에 놓인 영화 입니다. 감독인 알란 파커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심은 온전하게 부각이 안 되고¸ 그 속내를 유연하게 내보이고자 차용한 스릴러의 긴장감이 더 크게 작용한¸ 절반의 성과만을 이룬 경우라는 말입니다.

2016/02/16 09:07 2016/02/1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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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똑같이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밥을 챙겨 먹고¸ 늘 보는 사람에게 통상적인 안부를 건네고 미뤄둔 일을 처리하고 계획을 세우는¸ 그렇게 적당히 분주하고 별다를 것 없는 하루 속에서 문득 뭔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시간을 팽팽하게 당기던 긴장은 끊어지고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던 생활 리듬은 깨져 버리고 삶의 질서와 조화는 붕괴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의미를 잃고 의지의 중력은 상실됩니다. 단 한 순간입니다. 존재를 맥빠지게 만드는 그 서늘한 느낌에 딱히 둘러댈 수 있는 핑계거리라도 있었으면 위안이 되련만 사실 거기에는 어떤 뚜렷한 이유도 없어 더 막막합니다.


남들 보기에 멀쩡하고 탈없이 굴러가는 듯 싶은 그 어떤 삶에도 이런 순간의 틈이 존재합니다. 『디 아워스』의 초점은 바로 그 틈을 발견한 하루입니다. 하루¸ 정확히 말하자면 세 개의 하루들이 사소한『사소해 보이는 그러나 의미 심장한』 지점을 통해 겹쳐지고 맞물립니다. 1923년 영국 리치몬드 교외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 1951년 미국 LA 『댈러웨이 부인』을 손에서 놓지 않는 가정 주부 로라¸ 2001년 미국 뉴욕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출판 편집자 클라리서. 시공간의 구조 속에 흩어져 있던 이 세 사람이 스크린 속에서 우연인 듯 절묘하게 엮입니다.



일정한 삶의 궤도에 올라 선 나이의 그들은 특이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파티를 준비합니다. 손수 고른 꽃이 화병에 꽂아지는 순간¸ 옆으로 돌아눕는 순간¸ 여성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 『댈러웨이 부인』을 쓰고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려지는 순간¸ 화를 내거나 기껏 만든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거나 눈물을 흘리고 마는 순간¸ 세 명은 하나의 이미지로 투영됩니다. 미묘하게 닮아있는 점들이 차곡차곡 쌓여 감정의 덩어리로 응축됩니다. 감독은 그들의 삶을 교차시켜 연결하고 있는데 시공간을 겅중겅중 뛰어넘는 단절된 편집을 이용하기보다는 세 인물을 같은 톤으로 통일¸ 차례차례 놓는 방식을 택해 물 흐르듯 하나의 맥락을 형성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방식은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간극을 해체시키며 통시적인¸ 나아가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인간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붙박이고 마는 역할들을 자각할 때 댈러웨이 부인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고정된 존재가 오히려 혼란스럽다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고정 과정은 분명 배제를 거친다『인간이 상징계로 진입할 때 억압받은 것들이 무의식을 형성하듯』. 그리고 배제된 것들은 수면 위로 떠오를 틈을 엿보며 의식의 언저리를 맴돈다. 즉¸ 고정된 역할을 깨닫는다는 것은 배제된 가능성까지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하지 않은¸ 논리적 이성적으로 언어화할 수 없는 욕망의 형태로 부풀어올라 사람을 혼란과 우울로 몰아갑니다. 역할은 기대됩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역할을 지니고 그것에 안주하지만 기대되고 싶지 않다는 욕망 역시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역할을 자각한다는 것은 그 모순과 대면한다는 뜻. 언니가 동생을 기대할 때¸ 남편이 아내를 기대할 때의 버지니아 울프¸ 역시 남편이 아내를 기대할 때¸ 아들이 엄마를 기대할 때의 로라¸ 리처드가 댈러웨이 부인을 기대할 때¸ 딸이 엄마를 기대할 때의 클라리서 모두가 그런 모순을 경험하고 분열됩니다.


인간을 가장 옥죄는 형태의 기대는 사랑과 결부된 형태의 것입니다. 떠나려는 버지니아 울프의 발길을 되돌리는 건 남편의 사랑 고백이며 자살을 결심한 로라를 흔드는 것은 아이『혹은 생명』에 대한 사랑¸ 클라리서가 댈러웨이 부인이기를 자청하는 것 역시 리처드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 행복하리라는 순진하고 단순한 발상과는 달리 영화에서 사랑의 결말은 그리 아름답지 읺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행할 때『불행하게도 이건 사랑의 근본적인 속성 중 하나지만』 그 사랑은 상대의 목을 조르는 폭력이 됩니다. 그리하여 리처드는 뛰어내리기 전 창턱에 앉아 자신을 위해 파티를 준비하는 클라리서를 향해 당신『you』의 삶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세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재연되기보다는 변주됩니다. 아무리 세 인물이 같은 행동을 했다 치더라도¸ 그 행동들에 대한 해석은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한 인물의 한 행동의 의미는 다른 인물의 다른 행동에 닿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옭아맨 삶의 모순에서 해방되었다면¸ 로라는 가족을 떠남으로써 클라리서는 리처드가 죽음으로써 해방되는 것처럼. 따라서 댈러웨이 부인들은 세부적인 엇갈림이 어우러져 궁극적으로는 일치하는 기묘한 화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내러티브 구조는 절대적으로 결합하지 않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기초하여¸ 풍부한 독해의 가능성을 껴안습니다.


원작이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서 출발했다는 것과¸ 여성들을 조명하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여성의 지난한 삶을 드러낸다는 표면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진정한 페미니즘이 그렇듯¸ 사회 구조 속에서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비정상으로 치부되어 억압당한 모든 것에 자유를 주고자 하는 의미에서 그렇다. 『디 아워스』에서 다루는 동성애나 양성애 역시 이성애라는 주류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억압당하고 숨겼고 몰랐던 부분을 인정하고자 하는 맥락에서 함축적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히로인 니콜 키드만¸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우열을 가릴 수 없습니다. 소용돌이치는 자아를 줄 위를 걷듯 아슬아슬하게 발현합니다. 그녀들의 회청색 표정이 심장을 길고 깊게 울립니다.

2016/02/15 09:14 2016/02/1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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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극장가를 장악한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그리고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두 영화는 모두 3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으로 아무리 의자가 좋은 극장에서 보더라도 엉덩이를 한번이상 움직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판타지 대작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상관이 없지만¸ 친구나 동료따라 억지로 극장에 끌려간 사람들이라면 이 같은 작품들은 고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실제로 필자는 이런 작품들이 온통 괴롭기만 하다』


『익스트림OPS』는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나타난 구세주 같은 작품입니다. 일단 90분이 채 안 되는 러닝타임은 긴 영화에 질려버린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입니다. 거기다 그 90분이라는 시간동안 한 일초도 지루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만큼 더 기쁜 일이 또 있으랴.



익스티림한 장면들을 연출하기 위해 선택한 소재는 스포츠와 CF다. 실감나는 영상을 담아내기 위해 실제 눈사태가 일어나는 장면을 찍겠다는 포부를 가진 CF제작팀과 동계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스키어 그리고 한계에 도전하는 광적인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들이 힘을 합해 촬영지를 향합니다. 여정부터 심상치 않은 그들은 우연한 사고로 호텔에서 쫓겨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눈 덮인 산봉우리에 건설중인 리조트에서 짐을 푼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 미완의 리조트에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의 두목이 죽음을 가장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CF 촬영팀을 CIA로 오인한 테러리스트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멤버들간의 사투가 대설원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으로 보이는 캐릭터가 없습니다. 나사가 하나쯤 빠졌거나 뭔가 홀린듯한 모양새다. 여행을 시작하며 기차에 매달려 레일 위에서 보드를 타는 장면을 필두로 동계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도 따라가지 못하는 놀라운 스키 실력을 선보이는 장면까지 한마디로 탄성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레일 보드 장면이 실연이라는 점은 단순히 특수효과에 길들여 졌던 이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듭니다. 저게 과연 가능할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네들의 몸놀림은 가히 놀라움을 넘어섰습니다. 과격한 하드-락에 맞춰 90분 내내 쉴새 없이 펼쳐지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보고 있노라면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이 보여주는 돈 많은 판타지가 전혀 부럽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 입니다.


『슬랙커즈』¸ 『데스티네이션』등으로 낯익은 데본 사와가 예의 샤프한 모습에 몸집을 불려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는 점이 반갑게 느껴지며¸ 『버티칼 리미트』나 『클리프 행어』를 재미있게 봤던 이들이라면 『익스트림OPS』는 필경 반가운 작품이 될 법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나열한 비교대상 작품들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는 활기참은 스크린 곳곳에 녹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제목 그대로 내내 익스트림하다』.



스토리의 얼개가 부족하고 갈등이 지나치게 쉽게 풀리는 등 이야기에 대한 미숙함은 덮어 두도록 하자. 어차피 90분간 설원에서 펼쳐지는 화끈한 액션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이들에게 이 정도면 충분히 7000원의 가치는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공룡들 사이에서 개봉을 단행했으니 그 용기에도 박수를 쳐주고 싶다.

2016/02/14 07:02 2016/02/1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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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을 떨친 연쇄살인범 신의 손. 그의 뒤를 쫓던 FBI 요원은 신의 손이 자살한 뒤¸ 그의 형이라고 주장하는 펜튼과 만나게 됩니다. 펜튼은 어린 시절¸ 자신과 동생이 사람들을 죽이던 아버지에게 이끌려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아버지는 사람을 죽이기 전에 꼭 그 사람들의 신체에 손을 갖다 대고는 했다는 점 또한 상기시킵니다.


2002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 공식 출품 되었던 『프레일티』는 자신도 모르게 부여 받은 능력에 관한 딜레마와 이를 통한 정의의 실현여부에 대한 정당성의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타임 투 킬』¸ 『웨딩 플레너』¸ 『레인 오브 파이어』 등에 출연하며 화려한 명성을 구축하고 있는 매튜 맥커너히가 출연하고 있으며¸ 『타이타닉』¸ 『트위스터』¸ 『버티칼 리미트』등에 출연했던 빌 팩스톤이 주연으로 등장함과 동시에 연출까지 담당하고 있어 특별히 그의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어머니를 여의고 두 아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던 가장이 어느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세상의 악을 섬멸해 가는 과정은 그다지 힘이 느껴지거나 공포스럽게 받아 들여지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죄를 추궁한 다음 아이들의 손을 통해 도끼질을 해 대는 장면은 그 생생한 소리와 음침한 분위기를 통해 약간의 섬뜩함을 유발시킵니다.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칙칙한 날씨와 어둠 그리고 스산함은 영화 전체를 무겁게 눌러대지만 그 분위기에 필적하는 다른 요소가 없다는 점은 관객들을 쉽게 지치게 만듭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배우 출신의 감독답게 캐릭터들의 개성을 독특하게 살리면서 그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숀 펜의 『인디안 러너』나 케빈 스페이시의 『알비노 앨리게이터』처럼 배우 출신 감독이라서 더욱 잘 그려낼 수 있었던 정교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는 영화를 받쳐주는 유일한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과 그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을 겪어야 했던 한 사람의 갈등은 매튜 맥커너히의 그로테스크한 표정을 통해 섬세하게 살아나며¸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움직이는 빌 팩스톤의 자연스러움으로 승화해 영화의 신비스러움을 강조합니다.



영화는 뭐 하나 특별히 내 세울만한 매력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분위기와 배우들의 독특한 캐릭터 그리고 드라마 엑스 파일에서나 나올 법한 소재가 관심을 끌고 있을 뿐입니다. 내용의 흐름에 임팩트가 약하다 보니 자칫 영화가 지루하거나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그 내용을 밝힐 수는 없으나 약간의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몇 차례 반전을 보고 나면 갑자기 머리가 띵해질 정도의 충격과 함께 혼란이 엄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길 기다렸던 관객들에게 마지막으로 선사하는 반전이라는 선물은 그러나 앞서 보여졌던 맥 빠진 이야기 전개 때문에 그다지 효과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충분히 반전이란 말에 충실한 무언가를 보여줍니다. 이야기에서 속도감과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유기적으로 함께 얽혀드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프레일티』는 매튜 맥커너히가 어떻게 변신을 했는지 궁금한 사람들과 도대체 마지막 반전이 무엇이길래 라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는 이들에게만 조심스럽게 추천하겠습니다.

2016/02/13 09:55 2016/02/1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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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를 작년 이맘때쯤 보았었는데¸ 그 날은 유난히도 무더웠던 기억이 납니다. 발끝으로 빨아올린 아스팔트의 열기가 정수리까지 치밀어 올라 자연발화라도 할 것 같던¸ 지하철이며 버스에서 부딪혀 오던 끈적끈적한 낯선 살갗에 괜히 심술이 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싱그러운 웃음 한 번 지어주지 못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한 아이와 중년 사내가 길을 떠난다 뭐 그 다음은 좀 뻔한 거 아냐 여정에 도사리고 있는 순간 순간의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며 둘은 서로를 의지하게 되고 세상에 찌든 중년 아저씨는 아이의 순수함에 점점 마음을 열 테고 고로 간단치 않았던 여행을 무사히 끝내고 아이는 한 뼘쯤 자라서 돌아오겠지


아이와 어른을 짝 지워서 여행 보내는 낡은 설정에 이 영화 반쯤은 먹고 들어가네 식의 건방진 영화 관람 태도는 그러나¸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습니다. 일본 특유의 황당하고 촌스러운¸ 그래서 때로는 유치하게까지 느껴지는 코미디에 헤죽헤죽 웃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여름이라면 질색이던¸ 천상 겨울에 태어난~ 얼음 덩어리 우진군이 스크린이 뿜어대는 따뜻한 여름 풍경에 흐물흐물 녹아 내린 기괴한 장면. 아무래도 그 땐 더위를 단단히 먹었었나보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수더분하고 살갑다. 영화를 이어나가는 에피소드들은 평범하지만 잘 어울려 사람냄새를 폴폴 풍깁니다. [배틀 로얄]의 비정함으로 기억되는 기타노 다케시의 무표정마저 무심한 듯 묵묵하게 풍겨나는 인간미로 발현됩니다. 하지만 마냥 착한 플롯이 이 영화의 미덕은 아닙니다.


엄마 찾는 고달픈 여행 끝에 만난 어머니는 아이가 품었던 숭고한 모성의 환상을 산산이 깨뜨립니다. 아이를 덮고 있던 어머니의 그늘¸ 거짓된 진실을 벗겨내며 [기쿠지로의 여름]은 정통 성장영화의 연장선에 섭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그렇게¸ 어린 우리를 감싸고 있던 안락한 거짓을 벗고 알몸으로 세상에 나서는 것¸ 거친 삶의 공기에 긁히면서.


어머니를 제외한¸ 더욱이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등장인물은 모두 남자다. 남자들만의 세상을 꾸려 나가는 감독은 마치 새로운 연대를 꿈꾸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성의 연대를 강조하는 여성영화의 거울상같은 이 영화는 사실 남성영화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가족관과도 연결됩니다. 가족이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요?라는 질문에 누가 보지만 않으면 내다버리고 싶다던¸ 가족에 대한 회의가 그로 하여금 또 다른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만들지 않았을까요? 성장영화의 형식을 빌려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족에 속박되어 가는 정상적 인간관계에 반기를 들고 싶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이 세련된 풍미를 갖춘 영화는 아니지만¸ 소탈한 심성이 그리운 사람에게 적당한 온기를 전해주는 영화 입니다. 어디 시간의 흐름이 늦춰진 시골 마을로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사람에게 또한.

2016/02/12 11:48 2016/02/1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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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절절한 모성으로 스크린을 달궜던 [미워도 다시 한번]이 돌아왔습니다. 드라마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김수현의 손길을 거쳐 다시 태어난 [미워도 다시 한번 2002]. 60년대 구식 멜로 드라마가 2002년에도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미워도 다시 한번]의 큰 구도는 미혼모인 어머니가 자식을 아버지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 2002]는 이 설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세부사항을 현대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수정은 당차고 대담한 여성으로 묘사되며 직장동료들 또한 그녀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김수현의 거침없는 대사와 꼭 맞아떨어집니다. 경제적인 능력과 모성을 갖추고 있는 수정이기에 그녀에게서 딸을 빼앗기 위해서는『?』 특별한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영화는 불치병이라는 카드를 내놓으며 어머니와 딸의 이별에 논리를 부여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미혼모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설정은 불륜이라는 사회적 금기와 맞물려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여성의 희생을 정당화시킵니다. 도입부 현대적 이미지의 여성은 어느새 사라지고 진부한 사고의 틀 속에 갇힌 전통적 여성만 남습니다.


전체적인 전개는 단촐합니다. 단선적인 구성에 군더더기가 별로 없습니다. 전개 속도도 빠릅니다. 적당하게 벌어지는 김수현의 대사들이 플롯에 탄력을 줍니다. 앵글도 편집도 익숙하고¸ 배우들의 연기 또한 무난합니다. 이승연은 현재 김수현의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어서 인지¸ 대사처리에 능숙합니다. 알맞은 속도로 입맛 다시듯 대사를 뱉어냅니다. 그래서 특별히 늘어지거나 지루한 감은 없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TV 베스트극장에나 어울릴 듯한 무난한 이야기를 굳이 큰 화면으로 감상할 이유는 없습니다. 영화는 보다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부단히 추구하는 매체입니다. 관객도 그것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습니다. 모든 면이 상투성에 잠겨있는 영화가 매력을 갖기란 어렵다.



[미워도 다시 한번 2002]의 가장 큰 실수는 음악입니다. 현악기를 이용한 절망적인 선율은 두드러지게 청승맞다. 영화음악은 의도와는 달리 화면에 녹아들지 못하고 자꾸 튀어 거슬립니다. 안 그래도 밋밋한 영화의 흡인력을 더 떨어뜨립니다.


이 영화는 2002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낡았습니다. 시대착오적인 신파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합니다. 소재의 상투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욱 공을 들였어야 했습니다. 배우만 바꾼다고 새 영화가 되는 건 아닙니다.

2016/02/11 10:55 2016/02/1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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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펜터를 기억하는가. 많은 컬트 팬을 거느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호러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그가 3년 만에 신작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보였던 작품은 『슬레이어』란 영화로 뱀파이어와 헌터의 대결을 화려한 영상으로 그려 개봉당시 전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필시 돈을 많이 들였을 법 한 영화임에도 어쩐지 뭔가 허전하고 비어보이고 싸구려인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존 카펜터라는 이름 뒤에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조제된 듯한 느낌의 싸구려적인 냄새가 풀풀 풍겨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돈이 없어서 싸구려로 찍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싼 것처럼 보이게 하는 느낌. 『뉴욕탈출』¸ 『빅 트러블』¸ 『공포탈출』등이 그의 대표적인 싸구려 느낌의 비싼 영화들입니다. 의도적인 싸구려 분위기를 만들어 내던 감독이 메이저 영화사와 손을 잡고 『엘에이2013』을 만들어 냈을 때 스튜디오는 혀를 내둘렀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번에 공개되는 『화성의 유령들』도 감독의 전작들 처럼 의도적으로 촌스러운 모양새로 포장된 작품입니다. 몰락한 지구를 떠나 화성에 정착한 사람들과 화성에 존재했던 유령 혹은 인간에게 침투하는 외계인들과의 혈투『?』를 다룬 이 영화는 사지가 절단되고 머리통이 날아 다니며 화면이 온통 피범벅이 되는 정통 스플레터 형식에 SF를 가미하고 있지만 여전히 잔인한 장면들은 유머와 촌스러운 특수효과로 자연스럽게 무마되며¸ 조악해 보이는 화성 세트와 미니어처들은 때때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했을 때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러한 쌈마이 스타일의 존 카펜터만의 농담이 아닐까요? 『엘에이2013』에서 성전환자로 나왔던 팜 그리어가 이번에는 레즈비언 기질을 가진 캡틴으로 등장하고¸ 창백하고 끔찍한 귀신들은 『뱀파이어』에 나왔던 악당들의 얼굴에 피어싱을 조금 했을 뿐입니다. 섬뜩한 느낌을 주는 가위와 칼 부메랑 등의 모습은 지나치게 과장되고 심하게 말해 유아스럽기까지 합니다.



지나치게 섬세한 공포로 화면을 휘감던 일부 호러 영화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카펜터 식의 영화에 이질감을 드러낼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더 헌팅』¸ 『13고스트』 등과 같이 CG가 화려한 작품들을 기대 하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실망만 느끼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어떤 영화도 이만큼 유머스럽고 재치있으며 감독의 특성을 자연스럽고도 정확하게 드러내는 작품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디지털화 된 영화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특별히 이런 영화도 한번쯤 권하고 싶은 것이 필자의 마음입니다.

2016/02/10 10:09 2016/02/10 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