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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당했던 시대의 설움을 구구절절 교육받아온 탓일까요. 잊을 만하면 불뚝불뚝 솟아오르는 그네들의 망언 때문일까요. 어쩌면 전쟁의 상흔을 기민하게 딛고 저만치 부상해버린 그들을 올려보는 자격지심 때문인 걸까요. 일본의 역사에 대한 개입을 접할 때마다 그들과 눈길 한번 나누어 보지 못한 나조차 유독 신경이 곧추서곤 합니다. 단지 감동과 눈물 카피에 홀려 각박한 마음을 잠시나마 포근히 적셔보려고 찾아간 [호타루]는¸ 그런 이유에서 도리어 내 마음의 결을 거스르는 영화였습니다.


보드라운 화면과¸ 담담한 전개로 무장한 이 영화는 일본의 국민배우라는 [철도원] 아저씨 다카쿠라 켄의 편안한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워 휴먼 드라마임을 강조합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잔잔한 자연 풍광과 소박한 사람들의 도타운 손길은 분명¸ 살갑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배경처럼 따뜻한 눈으로 『일본의 영원한 치부로 남을』 제2차 세계대전까지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성급했거나¸ 너무 교활했습니다. 거창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소외되어 왔던 개인의 사사로운 역사를 들추는가 싶더니¸ 그 사적인 감성으로 한국인에게 화해를 청합니다. 하지만 그 다사로운 몸짓을 덥썩 받아들이기엔 갸웃갸웃 영 석연치 않은 것은 비단 내가 가진 일본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 때문만은 아니리라.



[호타루]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은 참 착합니다. 천황이 서거했다는 소식에 자살을 감행하는 옛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그저 순진하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에 휩쓸린¸ 가련한 희생양처럼 보입니다. 출격하는 군인들을 다독이는 할머니는 거룩한 성녀의 역할을 떠맡습니다. 다카쿠라 켄이 연기한 야마오카 또한 식민지 한국에서 온 김선재에 대한 일말의 거리낌없이 그를 존경하고 마음에 품습니다. 전쟁 당시 일본인이라고 모두 뒤틀려 있었던 것은 아닐 테니¸ 그런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에 불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단지 그들의 선함만이 부각되면서 일본이 반성해야할 부도덕한 역사는 은근슬쩍 자취를 감춘다. 평범한 일본인의 인간적인 고뇌만를 조망하고 껄끄러운 책임은 영화의 밖에 밀려나 있는 비범한 일본인에게 전가시켜버리는 형국입니다.



야마오카가 그의 생명의 은인인 김선재의 약혼녀와 결혼하여 소소하게 꾸려나가는 삶의 여정에서¸ 일본인은 그들의 빚을 제법 겸허하게 감당해 왔더라는 흐뭇한 표정이 엿보입니다. 따라서 그가 김선재의 고향 안동을 찾아 사죄하는 설정은 역사의 엉킨 매듭을 풀려는 시도보다는 친절한 감상에서 우러난 자기만족의 행위로 느껴집니다. [호타루]의 250만 일본관객들이 흘렸다는 눈물 또한 아마도 짙은 회한과 참회의 눈물이 아닌¸ 얄팍한 자기 정화의 그것이 아니었을런지. 감독은 자국민을 위안하기 위해 한국을 차용했던 것일까요.


스크린을 등지니 이건 아닌데 씁쓰레한 아쉬움이 혀를 감돌았습니다. 아직 예민한 앙금이 밟히는 한일관계를 조금이나마 매끄럽게 다듬기 위해서는¸ 더욱 신중해야 할텐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인류애로 포장한 거짓 사죄가 아닌 진정한 반성입니다.

2016/02/07 09:37 2016/02/0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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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런 영화 입니다. 엔딩 크래딧이 모두 올라가고 조명이 환하게 얼굴을 내리쬘 때까지도 여전히 칠칠치 못한 눈물을 또록 굴리면서 되 뇌였습니다. 또 이런 영화군. 집으로 가는 길¸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산산한 바람과 함께 애써 추스리며 다시 몇 번이나 중얼거려야 했습니다. 또 이런 영화네. 또...


혹자가 술자리에서 얼큰하게 설파하던 상업영화가 잘 되야 고양이¸ 나비¸ 와이키키 다 만들 수 있는 거라니깐. 논리에 하릴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극장가에서 꼬리를 감춘 고양이¸ 날개 꺾인 나비¸ 비바람이 부는 와이키키에 대한 안타까움은 마음을 저민다. 한편에서는 한국 영화 전성시대네 뭐네 목소리 큰 조폭들이 몇 백만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데¸ 목소리 작고 얌전한 영화들은 겨우 몇 천¸ 몇 만의 관객을 헤아린 후 사그라지는 모습들. 영화판의 파이가 얼마나 더 커져야 이 가난한 백성들에게도 맛난 파이 한 입 돌아갈까요?



그 곳에 가면 모든 슬픔¸ 아픔 다 잊을 수 있대요. 에이¸ 그런 데가 어딨어요. 있어요. 그런 덴 없어요. 상처 입은 세 영혼이 너덜한 마음을 모아 쥐고 허위적 허위적 잡아 보는 마지막 지푸라기¸ 꽃섬. 사람들이 엉클어져 살아가는 이 땅 위에 슬픔도¸ 아픔도 없는 유토피아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혜주 엄마¸ 아니 옥남은 그저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그녀의 가냘픈 믿음은 그들이 눈길을 헤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삶이 턱 막히는 나락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 그게 희망인지도 몰랐을 미약한 믿음의 꽃씨. 하지만 그녀들의 고단한 숨결은 결국 영화의 막바지에서 새싹을 피워냅니다.


어쩌다가 들어선¸ 얼토당토않은 길을 되짚어 꽃섬으로 향하는 그들의 여정에 동행하는 것은 디지털 카메라입니다. 혜나의 디지털 카메라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생생하게¸ 가장 내밀한 아픔을 솔직하게 포착해 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카메라에 자신의 치부를 들킬 새라 자꾸만 그녀의 시선을 뿌리친다. 세상을 들여다봄으로써 치유의 날개를 달아보려 했던 혜나는 도리어 자꾸만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쳐집니다. 그러던 그녀는 비밀에 싸인 엄마의 죽음을 마음에 묻고 바다를 처음 보면서 차츰¸ 삶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깨달아 갑니다.


이 영화에서는 마법이 주요한 줄기로 작용합니다. 하나 둘 셋 하면 사라지는 거북이와¸ 명상 속의 눈물로 상처를 씻어 내리는 최면술¸ 그리고 역시 하나 둘 셋에 이 혼탁한 삶에서 사라진 유진. 세상과 소통하는 기이하고 영묘한 주술들을 통해 영화는 우리에게 잠재된 의식을 일깨웁니다. 혜나가 터득해 가는 마법으로 우리가 마음 저만치 묻어둔 씨 한 톨이 풍요롭게 피어납니다.



어떻게 보면 군더더기일 수도 있겠지만¸ [꽃섬]에는 친절한 설명이 뒤따르겠습니다. 자못 난해한 형식을 선택한 대신¸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관객을 이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꽃섬]은 그렇게 다가서기 어려운 영화가 아닙니다. 부디 이번에는¸ 혜나가 꺼억꺼억 토해내는 울음 소리가 메아리쳐 숱한 관객들에게 전율이 되었으면. 아니¸ [나비]처럼 이틀만에 막을 내리지 만은 않았으면.

2016/02/06 12:57 2016/02/0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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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를 따갑게 쪼아대던 여름 햇살의 뾰족한 가시가 점점 뭉툭해져 가는 9월. 어김없이 한 계절에 이별을 고하고¸ 시나브로 일년의 반이 훌쩍 넘어버렸음을 문득 실감하는 환절기. 마음을 친친 옥죄어 오던 텁텁한 여름 바람의 고삐가 느슨해지는 이 때¸ 자칫 서글픈 마음의 여백을 감싸며 애틋한 감정을 북돋으려는 따뜻한 영화들이 속속 개봉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부여받은 인간은 누구나¸ 탄생에서 출발하여 죽음을 향한 여정을 겪습니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그 웅성거리는 과정이 곧 삶일 게다. 몇 번의 죽음을 목도하다 보니 드는 생각인데¸ 삶의 막바지에서 죽음으로 도달하는 경계에는 풀쩍 뛰어넘어야 할 막막한 터울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얇은 선 하나가 어렴풋이 그어져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계절과 계절 사이의 구분처럼¸ 삶과 죽음도 하나의 시간 선상에 차례대로 놓여져 있을 뿐.


알츠 하이머 병을 앓아 거동도 못 한 채 죽음의 평화만을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 앙투완과¸ 소아암 판정을 받았지만 아직은 삶의 희망이 더욱 절실한 장난꾸러기 사내아이 마티. 『쁘띠 마르땅』은 삶의 끝자락에서 저만치 죽음을 바라다 보는 두 사람을 내세워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 놓습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택하면서도 이 영화는 아득하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동정이 지나쳐 신파조로 흐르지도¸ 무리한 해피엔딩을 위해 황당무개한 기적을 등장시키지도¸ 그렇다고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로 스크린에 껌껌한 먼지를 드리우지도 않습니다. 『쁘띠 마르땅』에서 가장 돋보이는 미덕은 담담한 관조의 시선입니다. 감독은 놓치기 쉬운 유머를 영화 곳곳에 감칠맛나게 뿌려둠으로써 죽어 가는 사람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의 그림을 그리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 여유와 달관의 경지는 도리어 삶을 치열하게 부대낀 연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죽음에 바짝 다가선 삶은 안달하거나¸ 고요해집니다. 뒷걸음질치기 위해¸ 혹은 길을 둘러 돌아가기 위해 아둥대거나¸ 죽음에 몸을 내맡기며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티가 전자라면¸ 앙투완은 후자입니다. 마티는 이미 죽음의 세계에 더 다가가 있는 듯한 앙투완에게서 어쩌면 자신의 미래를 본다. 늦은 밤까지도 잠들지 못하고 끊임없이 왁자한 말썽을 부리는 마티의 모습에서 마냥 철없고 귀여운 아이의 맑은 마음을 넘어¸ 제 운명과 분투하는 의지가 읽힙니다. 그래서 앙투완에게 손을 내밀어 곧 자신에게도 드리워질 지 모르는 그림자를 걷어내려 애쓰는 마티는 관객에게 애달픈 웃음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결국 영화는 두 주인공의 소통을 이루어냄으로써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상통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카메라는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두 인물을 공평하게 응시합니다. 북적이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난 후¸ 할아버지와 아이가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 서서 망망한 수평선을 가만히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가슴을 아리는 뭉클한 애잔함으로 다가옵니다.


죽음을 빌미로 삶을 돌아보는 영화. 거창한 장광설이 아닌¸ 잔잔한 소곤거림만으로도 삶의 진실에 부쩍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준 영화 『쁘띠 마르땅』. 생명이 순환한다면 죽음에 맞닿은 인간의 형상이야말로 가장 순수하지 않을는지. 각박한 생활에 치여 순수한 감동을 기다려온 관객에게 꼭 어울릴 포근한 영화입니다.

2016/02/05 21:08 2016/02/05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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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비디오를 보겠다고 했을 때¸ 나의 선택이 옳은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을 했었습니다. 실사영화에 비해 애니메이션을 즐겨보지 않는 필자의 편식취향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작품의 배경은 아프리카이지만 제작을 한 사람들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에서 어쩔 수 없이 의심되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냄새가 불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나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비디오를 보자마자 필자의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색채는 필자를 이내 흥미의 도가니로 이끌었습니다.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삭제하되 그렇다고 하여 어느 무엇도 특별히 강조되지 않는 덤덤한 톤의 아름다운 영상은 애니메이션에 문외한인 본인마저도 감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배경이 꼼꼼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어지럼증을 유발시키는 저패니메이션이나¸ 색감이 거친 미국의 애니메이션과 비교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입니다.



프랑스인이 만들기는 했지만 색이든 배경 음악이든 모든 부분에서 아프리카적인 토속성을 살리려고 노력했던 점도 필자를 만족하게 한 부분입니다. 실제로 감독인 미셸 오슬로『Michel Ocelot』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당시 갓 프랑스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던 서아프리카에서 보냈는데¸ 그런 성장 배경의 인물이 감독이라면 으레 깔리게 될 식민통치의 향수라든지¸ 아니면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든지를 이 작품에서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시놉의 바탕도 프랑스에서 온 것이 아닌 서아프리카 민담에서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다분히 기술적인 부분이 흥미를 끄는 것만큼이나 내용면에서도 이 작품은 필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말을 할 수 있는 영특한 아이 키리쿠는 일반적인 아이들에 비해 몸집이 터무니없이 작지만 특유의 현명함과 재능을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을 구원하고¸ 결국 마녀까지 구원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수많은 교육용 애니메이션과 다를 바가 없지만¸ 이 작품은 그 이면에 너무나도 많은 하위 텍스트들을 숨기고 있습니다. 정작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내러티브에 내재한 하위 텍스트들입니다.


키리쿠는 마녀 카라바가 왜 나쁜지에 대해 궁금함을 가집니다. 그런 그의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은 간단합니다. 그녀가 마녀이기 때문이야.『parce que cest une sorciere』 결국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마녀가 나쁜 이유는 그녀가 마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범하곤 하는 치명적인 어법상의 오류입니다. 마녀『la sorciere』라는 말에는 이미 마법을 사용하여 나쁜 짓을 하는 여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키리쿠가 궁금해하는 부분은 마녀가 왜 마녀가 되었을까지 마녀라는 단어의 의미를 재차 드러내는 순환논증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여타의 등장인물들과 구분되는 점이 이것입니다. 키리쿠는 마을을 마녀에게서 구해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녀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녀 역시 구원을 해냅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적과 아가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키리쿠의 계속되는 왜라는 질문에 문제 해결의 모든 열쇠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엔 단순해 보여도 아동용 오락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카라바는 마녀가 되었을까요? 내용상으로 보면 그녀는 마을 남자들이 등에 가시를 찔러넣은 뒤에 몸이 아프게 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흉폭해졌다고 합니다. 어렵고 복잡한 정신분석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이것이 강간을 은유하고 있음은 쉬이 알 수 있습니다. 카라바가 유독 마을 남자들만을 마법의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런 의심에 확증을 줍니다. 마을사람들이 고통받는 가장 큰 이유가 샘이 말랐기 때문이라는 사실 역시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생명의 원천인 샘은 여성¸ 특히 모체의 문학적인 표현인데¸ 하필 카라바는 그 샘을 마르게 만든 것입니다.


키리쿠는 앞서 말한 왜라는 탐구의 언어를 통해 카라바의 본질을 파악해 내고 그녀의 아픔¸ 곧 등에 박혀있는 가시를 뽑아줍니다. 남근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가시는 카라바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본질적인 상처를 의미합니다. 역시나 주지할만한 사실은 그녀의 가시를 누가 뽑았는가입니다. 키리쿠는 명특하고 재능도 많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몸집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합니다. 키리쿠가 마을 사람들을 구해내는 영웅적인 행동들을 할 때마다 지겹도록 흘러나오는 마을 사람들의 노래 중 다음의 두 소절만이 계속 반복됩니다. 키리쿠는 작지만 용감하지『Kirikou nest pas grand¸ mais il est vaillant』¸ 키리쿠는 작지만¸ 많은 일을 할 수 있지『Kirikou est petit¸ mais il peut beaucoup』 우리말의 억양법과도 같은 이 노래가사는 작다는 것이 핸디캡임을 의미합니다. 작기 때문에 얻게되는 숙명적인 키리쿠의 타자성은 카라바의 그것과 비견할만한 것입니다. 키리쿠가 성인 남성이 아니라 아이¸ 곧 성성이 발현되지 않은 제 3자적 존재라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진 읺습니다.『키리쿠는 카라바의 아픈 상처가 나은 다음에야 성인이 됩니다.』 결국 모두가 행복하게 된다는 결론부는 정치성이 떨어지지만¸ 어쨌든 타자들끼리 이루어내는 상처 어우르기는 다분히 의미있는 시각입니다.


어쨌든 비디오를 보면서 하위 텍스트 분석에 시간을 소모하지 않더라도¸ 본 작품을 그냥 앉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나 값진 일입니다. 저패니메이션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 작품은 시원한 바람과도 같은 개운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필자가 느꼈던 감동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다.

2016/02/04 10:42 2016/02/0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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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검프]¸ [콘택트] 등으로 유명한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가 이번엔 공포 스릴러를 들고 관객을 찾았습니다. 특수효과를 이용한 드라마 만들기에 재능을 보여왔던 그가 다른 것도 아닌 스릴러장르를¸ 게다가 호러의 요소를 덧입혀 들고 왔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변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의 나이나 경력을 생각한다면 이건 정말 큰 모험이지 않은가요?


애지중지 키우던 딸을 대학기숙사에 보내고 홀로 남은 중년의 여자 미셸 파이퍼는 어느날부터인가 불안에 떨기 시작합니다. 욕조에 누웠다가 자신을 닮은 여자의 귀신을 보고 혼비백산 하는가 하면¸ 담너머에서 들려오는 옆집 여자의 울음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고¸ 결국 그녀가 보이지 않는 순간¸ 살인이 일어났다고 단정짓고 공포에 떨기 시작합니다.


저메키스는 첫 시도라고 보기는 너무도 능숙하게 관객의 공포를 자아냅니다. 이 중년의 여인이 갖는 공포를 각종 특수 효과를 동원하여 실재감을 입혔으며¸ 덕분에 영화초반 흔들리는 물풀의 모습만으로도 관객은 충분히 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적재적소에서 관객의 비명을 이끌어내는 영화의 긴장감은 저메키스 자신만의 공으로 돌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뭔가 수상쩍어 보이는 옆집 부부들¸ 그리고 그들을 훔쳐보는 이쪽의 부부『이창』¸ 살인이 일어났다고 단정하는 순간 불안에 휩싸이고 분열적 자아의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싸이코』¸ 알고보니 충격으로 결정적인 사건을 잊어버린 탓이었다는 설정『마니』¸ 그리고 부부관계를 둘러싼 또다른 음모『다이얼 M을 돌려라』들은 그 옛날 히치콕이 보여주었던 이야기들의 편린을 마치 퀼트보 만들 듯 조각조각 맞추어 놓은 것 같습니다.


중요한 듯 보였던 사건이 실은 별 것 아니었다는 히치콕식의 주의돌리기『맥거핀이라고 한다』를 이용하는 것이나 [싸이코]의 욕실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앵글과 화면구도에 이르면¸ 글쎄 이 영화를 온전히 저메키스의 영화로 보아주어야 하는지 조차 헷갈리게 됩니다.


첫 변신에서 히치콕을 떠올릴 만한 능수능란함을 선보인다는 건 어떤 면에서 그에게 성공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메키스도 스릴러를 만들 줄 안다는 것은 적어도 증명했으니까요? 그러나 또 그렇기에¸ 영화는 더더욱 안스럽습니다. 본래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불편하고¸ 보는 이도 괴롭기 마련. 주연을 맡은 해리슨 포드와 미셸 파이퍼는 나이를 넘어서는 열연을 보여주었고¸ 공포라는 이름을 앞에 붙인 장르답게 관객은 충분히 놀라고 긴장하지만¸ 감독의 욕심이 너무 앞선 탓이었을까요? 기대했던 반전이 나오지 않은 탓일까요? 다소 어색한 호러와 스릴러의 조합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테크니컬한 공포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었던 관객들은¸ 가려졌던 진실을 말로 다 설명하고는 두시간의 긴장을 서둘러 끝내려는 결말부에 이르러 잠시 허탈해집니다.



결국 미국의 중산층 가정¸ 그 평온을 가장한 불안을 이야기하려고 히치콕을 수없이 인용『?』한 거였던가. 물 속의 폭풍은 잔잔한 척 보일 때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일텐데... 저 물 속에 폭풍이 잠자고 있다고 말로다 해 버린 이상¸ 영화로서의 매력은 사라지는데... 게다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로운 것인 양 들었을 때¸ 더구나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전번 사람과 화술마저 비슷하다면¸ 듣는 사람은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달변가라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우리는 이미 다 알고있지 않던가. 달변에 이르기 위해 애 쓴 그의 노력은 높이 사겠지만 말입니다.


그나저나 호러와 스릴러 사이에서 잔뜩 줄타기를 하고난 관객들은 손에 난 땀을 어디다 닦아야 할까요?

2016/02/03 10:08 2016/02/0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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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웃의 악동 케빈 스미스 감독이 그의 네번째 작품 [도그마]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도그마라니? 교리? 언뜻 제목만 봐서는 심각하고 무거운 영화일거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감독¸ 괜히 악동이라 불리우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 대한 논쟁은 사절¸ 아니 포기함! 일체의 변명도 않겠음. 분명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종교영화가 아닙니다. 코믹 환타지 액션이므로 심각히 받아들이지 마시길...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떠오르는 이 문구들은 그가 왜 악동인가를 어설프게나마 짐작케 합니다. 그의 경고『?』대로 영화는 심각하기보단 오히려 지독하게 웃깁니다. 천사들은 타락하더니만 인간 세상을 마구 헤집고 다니며 악마보다 더한 짓을 하질 않나¸ 주님의 사자 메타트론은 불꽃과 함께 나타났다가 소화기 공격에 젖기까지 합니다. 세상에 주님의 불꽃이 소화기 정도에도 꺼질 수 있는 불꽃이었다니... 거기에 천사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옷을 벗어보이기까지.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인류를 구원할 예수의 마지막 자손이라는 여인이 하필이면 낙태전문 산부인과 의사라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의 뮤즈는 스트립 바에서 일을 한다! 이 영화에서 모든 종교적인 사항들은 기존의 엄숙함이나 절대적인 부분들을 모조리 무시해 버리고 뒤집어 엎습니다.



바로 이러한 면면들에서 이 영화가 미국 개봉 당시 엄청난 논란과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격한 항의자들에 대해 이 악동 케빈 스미스는 이 영화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이건 그저 코믹 환타지 영화일 뿐이에요 라며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합니다. 이 말에 항의자들은 일시에 바보가 된 것입니다. 종교영화도 아닌 그저 코믹 환타지 영화일 뿐인데...


얼핏 보기에 이렇듯 모든 종교적 가치가 전복된 듯 보여도¸ 사방에 피칠갑을 하긴 했지만 신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 종교적 신념이 전복된 영화만은 아닌듯 싶다. 오히려 신을 향해 보내는 감독의 치기어린 러브레터는 아니었는지...

2016/02/02 14:36 2016/02/0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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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환경이 성숙한 사회에서는 앰부시『Ambush』 인터뷰『공식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인물의 말을 듣기 위해 그가 다니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돌발적으로 질문하는 인터뷰』가 정당한 취재 방식의 하나로 인식됩니다. 인터뷰이도 이를 무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곧잘 쓰는 방식입니다. 한국에서는 이게 잘 통하지 않아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거나 무시당하기 일쑤다. 『쿼바디스』의 김재환 감독은 대형 교회 목사들을 만나기 위해 앰부시했으나 번번이 녹취를 따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대역배우와 가상 상황을 노골적으로 다큐에 삽입하는 형식을 도입했습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을 본뜬 마이클 모어『이종윤』가 한국을 찾아 취재하고¸ 직접 만나지 못한 인물을 대신해 배우 안석환을 등장시킨 다음 『뉴스타파』 최승호 PD와 『GO발뉴스』 이상호 기자 등을 우정출연시켜 따져묻는 식입니다. 그러고는 실제 취재된 내용과 융합해 한국 대형 교회들의 폐부를 비춘다.


『쿼바디스』는 3천억원이 넘게 들어간 사랑의 교회 건설 현장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부터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130억원대 배임 사건¸ 전병욱 목사의 신도 성추행 의혹을 거쳐 전두환을 위한 기도회¸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설교에 이르기까지 교회들이 돈과 권력에 복무한 현장을 두루 찾아갑니다. 교회가 일제에 타협하면서 권세를 유지해나간 행태는 한국 수구세력의 그것과 겹치며¸ 자금을 모아 대규모 교회 건물을 짓고 신도를 끌어들인 다음 채무를 충당하는 방식은 한국 토건 자본주의의 축소판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신도시가 건설될 때마다 무분별하게 초대형 교회 건물을 지었다가 신도가 모이지 않자 부도가 나고 경매에 넘어가는 꼴은 우리 사회에 저당잡힌 깡통 부동산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냅니다.


감독의 전작 『트루맛쇼』가 지상파 방송을 넋놓고 보는 시청자를 안타까워하고¸ 『MB의 추억』이 이명박 대통령을 뽑은 뒤 5년 동안 후회한 유권자들에게 성찰을 제안했듯¸ 『쿼바디스』는 각종 비리와 세습을 저지르는 목사들을 믿고 따르는 신도들에게 물음표를 던집니다. 다만 대역배우를 등장시켜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설정한 이번 형식 같은 것들이¸ 이 영화의 지지자들끼리만 손쉽게 공감대를 나누고 마는 차원을 넘어서 정작 성찰이 필요한 이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지는¸ 『쿼바디스』뿐 아니라 사회 참여 다큐를 제작하는 작가들이 가장 골똘히 고민할 문제일 것입니다.

2016/01/28 14:41 2016/01/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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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거쳐 껍질을 깨고 어른이 된다는 공식은 이야기 세계에나 존재하는 환상입니다. 먼지처럼 숱한 매일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뒤돌아봤을 때 자신이 지나온 길에 쓰러져 있는 일상이란 이름의 엄청난 수의 도미노 행렬을 발견하는 법입니다. 『보이후드』는 그 지난한 과정을 촘촘히 이어 붙인 일기장 같은 영화 입니다. 6살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가 사는 텍사스 집엔 누나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와 싱글맘 올리비아『패트리샤 아퀘트』가 함께 삽니다. 아빠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는 음악을 한다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이따금 찾아올 뿐입니다. 메이슨과 사만다는 엄마를 따라 낯선 도시로 이사를 다녀야만 합니다.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보이후드』는 6살 소년이 실제로 18살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따라가는 프로젝트다. 12년 동안 매년 만나 15분 분량을 촬영한 영화에는 소년 메이슨이 대학을 들어가는 18살까지의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이 차례대로 쌓입니다. 넘쳐나는 말의 성찬과 언어유희¸ 시간의 틈을 메워주는 유머¸ 사건의 중심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카메라¸ 시간의 흐름을 가늠케 해주는 절묘한 음악 등 링클레이터 스타일로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시간의 흐름 그 자체이며 누군가의 성장 과정은 이윽고 나의 이야기로 체험됩니다. 시간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에 대한 영화적 화답이자 영화사에 기록되어 마땅한 기념비적인 영화 입니다.

2016/01/22 15:31 2016/01/2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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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대학을 갓 졸업한 우차오『조우정』는 서장도 골칫덩이로 여길 만큼 열혈 형사다. 눈앞의 범죄에는 앞뒤를 못 가리고 달려들어 정직 처분까지 받을 정도 입니다. 한편 삼합회에서 잔뼈가 굵은 슈다푸『황보』는 특출한 능력도 없는 조직원으로¸ 보스가 맡긴 자금으로 타이에서 밀수한 보석 거래에 뛰어듭니다. 문제는 그 다이아몬드가 단순한 장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수부대가 거래 현장을 급습하고¸ 비밀정보부『SIS』는 과도한 수사를 진행하며¸ 외국의 테러조직까지 보석을 노리고 있습니다. 독단적으로 사건에 뛰어든 우차오는 슈다푸가 거래한 물건이 후버 시티를 뒤흔들 밀수폭탄임을 알게 됩니다.


대만에서 오랫동안 드라마를 제작한 채악훈 감독은 4년 동안 공을 들여 『블랙 앤 화이트』를 준비했습니다. 대만에서 큰 흥행을 기록한 TV드라마 『비자영웅』의 극장판으로 드라마의 프리퀄에 해당합니다. 철두철미한 신입 형사¸ 삽합회의 허술한 조직원¸ 그들이 엮인 중대한 범죄. 영화는 액션 버디물의 공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블록버스터의 규모를 늘리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준비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요. 그 안에는 숨 고를 여유가 없습니다. 우차오와 슈다푸는 버디로서 합을 맞추기도 전에 장물아비¸ 밀매조직¸ 삼합회까지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고¸ 슈다푸의 연인이나 폭탄 개발자까지 문제에 가세하면 150분이란 시간이 벅차게 느껴집니다. 화려한 캐스팅에 역할을 분배하느라 호흡을 고르지 못한 경우 입니다. 해당 편에 이어질 두번째 에피소드가 올해에 제작될 예정입니다.

2016/01/21 16:43 2016/01/2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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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법칙의 비밀』은 『브라질』『1985』¸ 『12 몽키즈』『1995』에 이어 디스토피아 3부작을 이룰만한 테리 길리엄의 망상적 SF다. CG의 터치를 빌린 판타지의 연속된 실패 이후 테리 길리엄은 복고풍의 수공예적 미장센으로 돌아왔습니다. 거대 컴퓨터 회사 맨컴에 근무하는 프로그래머 코언『크리스토프 왈츠』은 머리가 빠지고 건강이 악화될 정도로 혹독한 업무에 시달리지만 언젠가 걸려올 삶의 진실을 알려줄 전화를 기다립니다. 맨컴의 회장『맷 데이먼』은 그에게 제로법칙 프로젝트를 제안하며 자택근무를 허락합니다. 코언은 상담의사『틸타 스윈튼』의 컨설팅과 콜걸『멜라니 티에리』에게 심리적 위안을 받으며 성화로 가득한 수도원 같은 집에서 혹독한 수식 계산을 반복합니다. 그의 업무는 카오스를 통해 이윤을 얻는 회사를 위한 것일까¸ 공허한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론적 탐색일까요. 정답은 분명치 않지만 전화를 기다리는 코언은 불가능한 은총을 기다리는 카프카적 세계의 주인공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주인공 코언은 자신을 우리라는 복수형으로 부르는데¸ 독특한 철자의 이름『Qohen』은 발음상 영국 여왕『Queen』을 연상시키며 언어유희의 효과를 줍니다. 작품의 기본 설정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약성서 전도서의 세계관에 빅뱅이론과 같은 우주물리학을 결합시킨 것입니다. 발전과 변화를 바라지 않는 한에서라면 조잡하여 매혹적인 미장센¸ 어수선한 코믹 설정¸ 컬러풀한 색감¸ 강박과 망상 등 우리가 테리 길리엄의 세계에서 기대할 법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2016/01/20 22:00 2016/01/20 22:00